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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영찬] 포츠담 단상 (칼럼 제319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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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물류포럼(KOLOFO) 칼럼 제319호


포츠담 단상



김영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초청연구위원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1945. 5. 8)하고 두 달여가 지난 7. 15일과 16, 미국 소련 영국 전승국의 수뇌들이 속속 포츠담(Potsdam)에 도착했다. 이들은 포츠담에 있는 체칠리엔궁(Cecilienhof)에서 7. 17일부터 8. 2일까지 17일간이나 이어진 포츠담회담을 열고 독일의 전후 처리를 결정한 포츠담협정에 조인했다. 회담 중간인 7. 26일에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는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었다. 이제는 일반명사가 된 단어 뒤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현장을 가면 박제되었던 단어가 살아 움직이는 감흥을 느낄 수가 있다.


포츠담은 베를린 남서쪽에 강과 호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연해 있는 도시로 브란덴부르크주의 주도이며 분단 시절에는 동독에 속해 있었다. 두 도시를 이어주는 글리니케(Glienicke) 철교는 1907년에 세워진 오래된 다리로 냉전시대 동서 진영 간에 스파이 교환이 이루어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2015년 개봉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스파이 브릿지(Bridge of Spies)에는 이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교환은 1986년이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 포츠담시내로 들어서 Ceclienhof라는 표지판을 따라 그리 넓지 않은 도로를 따라가면 영국식 저택풍의 체칠리엔 궁이 나온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접근은 어렵지 않다. 베를린 시내에서 10분마다 있는 전철(S-Bahn)을 타고 40여분 걸려 포츠담중앙역에 내려서 전차, 버스를 갈아타면 된다. 연결편은 잘 되어 있는데 다만 전철이 건너는 다리는 글리니케교가 아니다.


독일이 항복한 후 전승국은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상징적으로 베를린에서 열고자 했다. 포츠담회담의 공식명칭이 ‘3개 연합국의 베를린회담(Berlin Conference of the Three Allied Powers)'인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베를린은 너무 많이 파괴되어서 정상회담을 열만한 장소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찾아낸 곳이 바로 이 체칠리엔궁이었다. 이 궁은 독일의 마지막 황태자 빌헬름을 위해 191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이름은 황태자비의 이름 Cecilie에서 따왔다. 응접실 등 공동 공간 외에 방이 150여개나 된다고 한다. 궁 자체도 회담장소로 적합했고 주변에 대규모 협상단이 묵을 숙소도 확보할 수 있었다.


피해를 덜 입었다고는 해도 제대로 관리가 안되고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군과 소련군은 회담 개시에 앞서 궁 진입로, 회담장, 숙소로 쓰일 인근 지역의 주택들을 수리했다. 회담장의 지름 3.05미터짜리 원탁은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만들어 왔고 협상단이 사용할 의자, 집기 등은 베를린 여러 궁전이나 저택에서 쓸 만한 상태로 남아있던 것들을 가져왔다. 포츠담회담에 참석한 3국 수뇌는 미국의 트루만, 영국의 처칠과 애틀리, 소련의 스탈린이었다. 그리고 각국의 외무장관 등이 동행했다. 미국에서는 그간 카이로, 얄타회담에 참석했던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서거(4. 2)로 부통령이었던 트루만이 대통령이 취임해 회담에 참석했다. 영국에서는 처칠수상과 애틀리 야당 당수도 함께 왔다. 7. 3일 영국에서 총선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회담 중간인 26일에 발표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틀리는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했다. 총선결과를 보기 위해 이들은 25일에 같이 귀국했다가 패한 처칠은 빠지고 애틀리가 28일 속개된 회담에 정식 대표로 참석했다. 미국 대표단에는 마샬플랜의 마샬, 소련 대표단에는 몰로토프 칵테일의 연원이 된 몰로토프 외무장관, 주미대사였던 그로미코도 있었다.


난항 끝에 82030분에 포츠담협정(Potsdam agreement)이 조인되었다. 독일은 분단의 길로 들어섰고 오데르-나이세 강 동쪽의 거대한 땅을 폴란드와 소련에 잃었다. 칸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도 소련으로 넘어가 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수백만의 독일인이 이 지역에서 추방되었다. 한편 회담 중간이었던 726일에는 일본에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이 채택되었다. 소련은 아직 일본과 개전 전이어서 당시에는 미국, 영국, 중국이 선언에 참가했다. 중국의 장개석은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텔렉스교신으로 동의했다.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카도간(Cadogan)은 그의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변의 모든 독일인들은 소개되었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만약 독일인이나 일본인이 영국에서 이런 일을 했다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가오? 우리는 쫓겨나 런던의 폐허더미에서 살고, 히틀러와 일당이 우리 집에 들어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면. ... 여기는 아름다운 곳이요. 모래밭에 소나무와 자작나무, 그리고 호수가 연이어 있는이라고 연민의 정을 담아 썼다.


독일이 통일(1990.10.3)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94년 초, 첫 동독지역 여행길에 포츠담을 들렀다. 그때는 유명한 상수시(Sanssouci) 궁만 보고 체칠리엔 궁에는 가보질 못했다. 포츠담회담이 열린 장소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1999년 다시 포츠담을 방문했을 때야 체칠리엔 궁에 들렀다. 접근로 옆에 늘어선 빌라풍의 집들은 통독 후 상당기간이 흘렀음에도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낡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2011년과 지난해 베를린에 갈 기회가 있었을 때에도 무언가에 끌려 다시 한 번 체칠리엔호프를 찾았다. 이제 집들은 말끔한 주택으로 바뀌어 있었다. 박물관으로 쓰이는 회담장, 트루만 처칠 스탈린 등이 머물던 방과 집기들이 잘 보전되어 있고 앞마당의 화단도 회담 당시 모습 대로이다. 많은 자료들은 그때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부속건물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가 20175월에 다시 문을 연다고 한다. 바로 앞에는 호수가 있고, 오래되고 큰 나무들이 마음을 포근하게 해준다. 카도간이 말한 대로 아름다운 곳이고, 정상회담이 열렸다는 것은 좋은 장소라는 보증이기도 하다. 동서독이 통일되어 이제는 무심하게 건너는 글리니케 다리, 박물관이 된 회담장, 평온한 풍경, 몰려오는 관광객들을 보며 우리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판문점이 분단시절의 기억을 담은 관광지가 될 날을 꿈꿔볼 수 있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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