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정보

  • 칼럼
  • 조찬간담회자료
  • 학술회의자료
  • 자료실
  • 학술자료검색
게시판글읽기
제목 [윤인주] ‘형제적’중국과 북한, 그리고 우리의 선택 (칼럼 제617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10-23
첨부파일 --

KOLOFO칼럼 제617


형제적중국과 북한, 그리고 우리의 선택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북방·극지전략연구실장 윤인주


20221016, 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열렸다. 시진핑 주석의 집권 3기를 열면서 중국이 대내외로 펼쳐갈 정치·경제 정책을 가늠할 수 있는 자리이다. 시 주석의 업무보고에 따르면, 향후 5년 중국은 집단지도체제보다는 당 중앙의 집중통일영도를 견지하고 강화하기로 했다. 또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견지하면서 전체 인민 공동부유를 실현하여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상호조화를 이루는 중국식 현대화를 목표로 내세웠다. 필자의 눈이 커진 대목은 통일 정책이다. 대만과의 평화통일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무력사용 포기는 절대 약속하지 않겠다는 것, ,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편, 지난 3주간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던 북한은 이틀 전부터 잠잠했다. 1017일부터 실시되는 우리 군과 미군의 연례 야외 기동훈련에 반발하며 14일에 군사행동을 한 것이 마지막이다. 사람들은 북한이 중국을 의식하여 중국 당 대회 기간에는 도발을 중단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필자는 둘 사이에 어떤 신호가 오가는가 싶어 양측이 주고받은 축전을 살펴보았다. 202210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3주년 기념 축전을 보낸 데 대해 시진핑 주석이 1013일에 답전을 보냈다. 며칠 있으면 제20차 중국 공산당 당대회가 열리는데 매우 중요한 대회이다, 국제 및 지역정세가 심각하고 복잡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니 단결과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등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형제적조선인민이라는 표현이었다. 중국 지도자가 북한 주민을 이렇게 친근하게 부른 적이 있던가?


최근 몇 년간 북한과 중국이 주고받은 축전을 보면 북한은 2018년부터 형제적중국인민이라는 표현을 매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북한은 이 형제적이란 표현을 라오스, 베트남, 쿠바에도 사용한다. “형제적조선인민은 주로 라오스 총비서가 북한에 축전을 보낼 때 등장한다. 중국은 이런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20229월과 10월에 연달아 사용했다. 그동안 중국이 보낸 축전에는 전통적인중조친선을 언급하며 두 나라”, “조선인민등 다소 객관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나마 최근에 시진핑 주석이 형제적조선인민이라고 언급한 적은 2014년 당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재추대된 것을 축하할 때이다. 사회주의국가 간의 축전 문화에 등장하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축전이 암시하는 분위기와 뉘앙스를 볼 때 시 주석이 형제적이라고 칭할 때는 북한을 인정하거나 같은 편으로 끌어안을 때라고 추정된다.


그런데 바로 이 시 주석이 대만과의 통일 정책에서 무력사용 가능성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발언을 형제적북한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바이다. 그렇지 않아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에 경종을 울렸다. 중국과 러시아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미국과 대립하며 전선을 형성할수록 북한은 이 형제적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할 것인가. 지난 9월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낸 축전에서 시 주석은 백년 만에 처음 보는 대변화가 급속히 일어나고 세계는 새로운 동란과 변혁의 시기에 들어섰다고 했고 10월에 보낸 축전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형세 하에서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해 더 큰 공헌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 당 대회에서 중국이 밝힌 노선은 북한의 그것과 닮아 있다. 당 중앙의 유일적 영도와 우리식 사회주의가 그것이다. 지난달 북한이 핵무력 정책을 법제화한 것은 핵무력 사용 포기를 절대 약속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형제적인 북한과 중국의 노선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신냉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무수히 논의해왔다.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은 구조적 요인이 컸는가, 행위자 요인이 컸는가. 어쩔 수 없는 신냉전에 갇혀서 다시 한 번 고통 받을 것인가, 행위자는 구조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 누구 혼자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다시 일어나거나 분단이 더욱 고착화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 달라질 수 있는 점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을 활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 선언을 비롯해 크고 작은 요소는 다르지만 강대국 대립의 틀은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예상되는 것들이 있고 그 종국을 알고 있으니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냉전도 결국은 데탕트를 맞았다는 사실을. 한반도만 덩그러나니 분단되었다는 사실을. 신냉전도 결국 신데탕트를 맞이할 것이다.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신냉전 후에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일지 내다보고 후회 없는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

.

* 이 칼럼은 저자 개인의 견해이며 저자가 속한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이전글,다음글
이전글 [정일영] 윤석열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를 포기한 것인가? (칼럼 제618호)
다음글 [김영윤] 북 쓰레기 연구와 남북관계의 향방 (칼럼 제616호)
목록

* 댓글 (코멘트) 0건

 

댓글
답변글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