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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함보현]‘마주침’을 허하라. (칼럼 제689호 2024.3.1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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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LOFO 칼럼 제689호 (2024.3.11)



‘마주침’을 허하라.


함보현

법률사무소 생명 변호사


입틀막.

요즘 들어 부쩍 입길에 오르내리는 말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누누이 강조하는 시절이라 더 괴기스럽게 다가오는 표현이다. 실제 입을 틀어막힌 이로 보면 개인적인 불행이요, 위정자에게 직접 소리라도 질러볼 수밖에 없는 답답한 현실은 고질적인 병폐요, 듣기 싫은 목소리를 끌어내고 저 하고픈 말만 울려 퍼지는 사이 다수의 침묵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자유민주주의를 갉아먹는 폐단이다. 비단 언론에 드러난 ‘막음질’만 있으랴.

“요즘은 해외에 있는 북한 식당에 출입하기만 해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을 것 같은 분위기예요. 괜한 걱정이 아니라 실제 그런 분위기라 우연히 만나는 상황도 알아서 피하게 되죠.”

오랫동안 남북 교류협력 사업에 참여해온 이의 한숨 섞인 말이다. 남북교류협력법 제정을 통하여 남북 주민 사이 교류와 협력이 법적으로 보장된 지 34년, 관련 법령과 함께 다수 사례를 통하여 교류협력 행위에 대한 법적 판단이 어느 정도 정립된 시점에 이런 하소연을 듣다니 놀라운 일이다.

우선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고, 그 해석·적용은 그러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제1조 제1항 내지 제2항). 회합·통신을 규율하는 조항에서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제8조 제1항). 북한 주민과 우연한 마주침, 국가안보를 해하려는 목적의 반국가활동으로 해석되지 않는 단순 의사교환 행위는 「국가보안법」의 적용 대상이 아님은 명백하다.

남한의 주민이 교류와 협력의 일환으로 북한의 주민과 회합·통신, 그 밖의 방법으로 접촉할 경우에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의 규율을 받을 뿐이다. 회합·통신·접촉이라는 표현이 어두운 과거의 잔재처럼 다가와 내내 거슬리지만 어쨌든.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르면 남북한 주민 간 접촉을 위해서는 통일부장관에게 미리 신고하는 것이 원칙이고, 부득이한 경우 사후 신고할 수 있다(제9조의2 제1항 전단). 신고제의 본래 모습과 달리 사실상 승인제로 운영되고 있고 통일부장관에게 과도한 재량권이 주어져 있다거나, 법 취지와 달리 접촉 규제 일변도로 운영되고 있다는 해묵은 비판은 잠시 접어두자. 현행 남북교류협력법에서 말하는 ‘접촉’은 남한과 북한의 주민이 서로 정보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과정, 특정한 의사를 교환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우리 법원은 이미 20년 전 “남한의 주민이 북한의 주민 등과 접촉할 의도나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접촉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라면 접촉에 앞서 통일부장관의 승인을 얻어야 하고, 접촉의 상대방이 특정되어 있지 않다거나 성사 가능성이 다소 유동적인 상태에 놓여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전 승인의 필요성이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대법원 2003. 12. 26. 선고 2001도6484 판결). 교역을 목적으로 긴급히 만나거나 여행 중에 우발적으로 만나 의사를 교환하는 등의 경우에는 사후 신고로 족하다(남북교류협력법 제9조의2 제1항 후단, 같은 법 시행령 제16조). 그 밖에 북한 주민과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상황이나 그야말로 물리적인 접촉, 일방적이고 의례적인 의사표현은 남북교류협력법의 규율 대상조차도 아니다. 법 규정과 해석을 떠나, 그저(오로지!)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넨다거나 식당에서 메뉴를 주문하고 값을 치르는 행위를 규율할 실익은 또 무엇인가.

남북한 주민의 접촉은 남북 교류협력의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행위 단계다. 접촉을 통하여 상대방을 이해할 기회를 얻고 갈등 속에 벌어진 틈새를 좁히며, 교류협력과 평화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 이러한 접촉을 과도하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은 상호 교류와 협력의 촉진, 이를 통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이바지하려는 남북교류협력법의 취지에도 반한다(1). 같은 법에도 이미 최소한의 규제의 뜻을 밝혀두고 있다. 통일부장관은 접촉 신고를 받을 경우 남북교류·협력을 해칠 명백한 우려가 있거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해칠 명백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신고의 수리를 거부할 수 있다(9조의2 3). 앞서 2005. 5. 접촉 행위에 대하여 기존 승인제에서 신고제로 변경, 신설할 당시에도 남북교류·협력을 저해하거나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에 반하는 경우에 한하여신고의 수리를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비록 그 사유가 포괄적이고 추상적이긴 하지만, 열거한 사유의 경우에만’, ‘한하여수리를 거부할 수 있다는 표현 속에 접촉에 대한 입법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국가안전보장 등을 해칠 명백한 우려가 없다면 원칙적으로 접촉 신고를 그대로 수리하고 문제 삼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교류협력의 역사와 상식을 역행하고 있다. 지난 8월 이후 민간단체들의 접촉신고 수리는 대부분 거부당하고 있다. 통일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개인이나 단체의 북한주민 사전 접촉신고가 39건 제출됐지만 단 6건만 수리됐다고 한다. 같은 해 상반기에 69건이 제출돼 57건이 수리되었고, 그에 앞서 2022년 110건 신고에 106건 수리, 2021년 153건 신고에 152건 수리, 2020년 207건 신고에 205건 수리, 2019년 614건 신고에 612건 수리, 2018년 713건 신고에 708건 수리에 비춰 크게 대비되는 수치다. 수리 거부의 사유로는 주로 ‘북한의 도발과 국가안전보장이 위협받는 상황’, ‘남북관계 악화와 긴장 고조의 정세’를 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통일부장관은 이와 같은 상황과 정세에 근거하여 접촉 신고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접촉 행위로 인하여’ 국가안전보장 등을 해칠 우려가(그것도 명백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수리를 거부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정부가 스스로 남북관계의 우려를 걷어내지 않는다면 민간의 접촉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하단 말인가.

접촉 차단의 차가운 얼음장 또는 으름장 아래에서 인도주의라는 보편성에 바탕한 지원과 교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국이 규정해놓은 남북한의 특수한 관계와 정세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능가할 만큼 그렇게나 특수한가. 마주침(rencontre)은 얼어붙은 정세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동시에 두 세계가 공명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그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아직 ‘입틀막’이라는 말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 사용자 참여형 온라인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에 ‘입을 틀어막다’를 줄여 이르는 말로 올라와 있을 뿐이다. 그나마 ‘놀라서 벌어진 입을 막을 정도로 벅차오를 때 쓴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다. 남북한 주민들이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모습에 감격하여 ‘스스로 입틀막’하는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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