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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영윤] 결단은 어디를 향해야 할 것인가? (칼럼 제613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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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LOFO칼럼 제613호


결단은 어디를 향해야 할 것인가?


김영윤

(사)남북물퓨포럼 대표

사람은 결정하는 동물이다. 결정이 큰 각오와 의지로 내려질 경우, 그것을 우리는 흔히 결단(決斷)으로 칭한다. 작은 결단이 있는가 하면 큰 결단도 있다. 결단에 따라 세계 역사가 바뀌기도 한다. 지난 8월 30일, 향연 91세로 우리 곁을 떠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그가 바로 그런 결단의 장본인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역사적 결단을 했다. 70여 년간 지속된 이념전쟁과 냉전구도를 종결시켰다. 그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는 세계의 정치적 상황을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게 했다. 갈등과 충돌, 진영으로 양분된 세계의 질서 구조를 깨뜨린 원동력이었다. 구소련 연방을 해체하고, 동유럽 국가에는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했다. 독일 통일을 가능케 하고, 통일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할 수 있도록 했다.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과정에서 구 소련군에 베를린 장벽 해체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끝내 결단하지 않았다. "그런 명령을 내렸더라면 그것은 재앙으로 이어지고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하는 실수가 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는 중·단거리 탄도·순항미사일의 생산과 시험·배치를 전면 금지하는 ‘중거리핵전력협정’을 체결(1987.12)했다. 미국과의 무한 군비경쟁에 제동을 걸어 동서 냉전의 벽을 허물었던 것이다. 평화와 공존을 향한 그의 결단은 노벨 평화상으로 돌아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르바초프는 전쟁을 발판삼아 독재의 길을 걷는 푸틴을 비판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터무니없는 전쟁”이라고 하면서 적대 종식과 즉각적인 평화 협상 개시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서방을 향해서도 "우크라이나를 나토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두 나라에 불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결단 발원지의 보수 세력은 고르바초프를 “조국을 저버리고 초강대국인 소련을 몰락시킨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쿠데타(1991.8)로 그를 대통령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1991년 12월 대통령 직을 사임하면서 고르바초프는 설복의 연설을 한다. 자신의 결단이 독재와 전체주의 국가가 인간을 압도하는 시대와의 단절이었다고 했다. “관료주의 통제 체제 하 질식해 가는 사회를 바꾸고, 이데올로기에 의존하여 무거운 군비경쟁의 짐을 내려놓게 했어야만 했다”고 토로했다. 극에 달한 긴장과 희망을 상실한 나라에서 계속 살 수가 없었기에 내린 결단, 그래서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만 했다고 외쳤다. 덕분에 폐쇄적인 구소련 사회는 동적인 사회로 변했다. 시장경제와 언론 자유화가 받아들여졌으며, 부패한 관료기구에는 일대 혁신이 가해졌다. 공산당에 대한 비판마저 허용됐다. 그렇지만 오늘날 고르바초프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정치적 유산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국가·지역·진영 간의 첨예한 갈등은 극을 향해 치닫고 있다. 반전 운동은 탄압당하고 독립 언론사는 문을 닫고 있다. 대립 속에서 상대를 억압·포위하고 있으며, ‘전쟁’이라는 수단마저 불사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갈등 해소와는 정반대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사태만 해도 그렇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미국이 독일 통일과정에서 수십 차례 걸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확대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고르바초프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념을 초월하여 인류가 공존하고 서방과 평화를 수호하려는 고르바초프의 결단이 지켜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강대국의 헤게모니 쟁탈전 때문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있다. 그것은 오로지 후대의 책임이라는 점이다. 그 결단을 발전시켜나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념을 달리하는 상대를 공존보다는 무너뜨려야 할 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고르바초프의 사망은 그의 결단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경건하게 한다. 고르바초프의 결단의 위대성이 어디에 있음을 알게 한다. 이념을 초월한 데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스스로의 변화를 향한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조국을 향한 변화의 결단, 그것이 세계와 역사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 우리의 교훈이다. 더욱 숭고한 것은 그의 결단이 진정성에 바탕을 두고 연속성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결단을 생각해 본다. 북한에 대한 ‘담대한 구상’은 과연 결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강한 적대적 정책을 유지하는 가운데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달아 지원을 하겠다는 결단이 과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진정성을 엿볼 수가 없다. 결단이 공감을 얻으려면 강한 설득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스스로의 변함없이 상대방의 변화만을 강요하는 결단은 희망이 없다. 윤 정부가 결단의 순간에 서려면 결단이 어디를 먼저 향할 것인지를 깨우쳐야 할 것이다. (본 칼럼은 9월 20일 내일신문에 게재된 것으로 제목과 경미한 내용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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